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헤미아 왕국 (문단 편집) == [[보헤미아 왕관령]] == 이후 보헤미아는 룩셈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는데 있어 최중요 근거지로 작동하였고, 룩셈부르크 가문과 보헤미아 왕국의 위상은 나날이 올라갔다. 보헤미아를 자기 세력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던 얀 루쳄부르스키와 카를 4세에 걸쳐 룩셈부르크 가문 국왕들은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다. 특히 <[[금인칙서#s-2.8]]>로 유명한 황제 [[카를 4세]]는 보헤미아를 자신의 근거지로 여겼고 보헤미아의 중심 도시인 [[프라하]]에 거주했다. 1356년, 카를 4세는 <금인칙서>에 보헤미아 국왕을 [[선제후]]로 확정해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의 보헤미아의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카를 4세의 통치기인 14세기 중후반 보헤미아는 금융, 무역, 학문의 중심지였으며, [[프라하 대학교]]도 이때 세워졌다. 보헤미아 왕국은 [[30년 전쟁]]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 중에 최고의 국력을 가진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룩셈부르크 가문은 결국 이방인이었다. [[잉여인간]] [[바츨라프 4세]]가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탓에 예상치 못하게 그의 동생인 [[지기스문트]]가 후계자로 지명되며 문제가 터지나오기 시작했다.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 상속 가능성이 없어서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러요시 1세]]의 딸 [[마리어(헝가리)|마리어]]와 결혼해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트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을 물려받았기에 보헤미아를 물려받는 것은 룩셈부르크 가문에서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결국 지기스문트가 5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자신의 미래 지분을 앞세우며 보헤미아 내부 문제, 즉 [[후스파]]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보헤미아인의 불만이 표출되어 조직화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기스문트가 바츨라프 4세 사후 정식으로 보헤미아 왕관과 신롬 황제관을 물려받자 대립이 급가속되어 최악, 최대치에 이르러 터져나온 것이 바로 [[후스 전쟁]]. 최종적으로 겉으로 보이기에는 평화 협정이라는 게 맺어지긴 하였으나, 실상은 누가 봐도 지기스문트의 굴욕적인 패배였다. 그리고 승패를 떠나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보헤미아인들이 단합하여 그릇된 신앙을 믿는 이방인 왕에게 대립하는 형세가 성립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어쨌든 지기스문트마저 후스 전쟁 패배 이후 후사를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는데, 이로서 신롬과 보헤미아는 두가지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첫째, 보헤미아 왕위가 다시 불안정해졌다는 것. 그리고 둘째, 보헤미아는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이지만 [[체코인|보헤미아인]]은 [[독일인]]과는 다른 이방인으로서 특수한 정체성이 있고 이로인해 보헤미아 귀족들에게는 일정수준의 자치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물로 형성된 보헤미아만의 특수한 정체성은 이후로도 시대를 거치면서도 계속되어 바로 오늘날 [[체코]]의 정체성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